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세기의 연인이자 20세기 대중문화의 아이콘
로마의 휴일(1953), 사브리나(1954),
티파니에서 아침을(1961), 샤레이드(1963),
마이 페어 레이디(1964)
지금까지도 아름다움의 대명사로 기억되고 추억되는 오드리 헵번(Audrey Hepburn).
그 아름다움 속 숨겨진 아픔을 알고 계신가요?




실제로 어린 오드리 헵번은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극심한 영양실조에 시달렸습니다. 산에서 튤립 구근을 캐 먹고, 전쟁터의 빈 집에서 상한 식재료들까지 먹어야 했던 어린 소녀.
오드리 헵번은 언제 폭격을 맞을지 알 수 없는 전쟁터 속 유니세프의 전신인 '유엔구제부흥사업국'를 만납니다.
이 직원들은 전쟁터의 어린이들에게 긴급구호 물자를 전달해주었습니다. 어린 오드리는 그 영양식을 먹고 꺼져가는 생명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. 하지만 오드리 헵번은 전쟁이 끝나고 연기와 발레를 배워 배우가 된 이후에도 영양실조 후유증으로 인해 각종 만성 질병에 시달렸다고 합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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오드리 헵번은 화려한 배우로서의 길을 접고 어린 시절 유니세프에게 받은 도움을 전 세계 어린이에게 돌려주기로 결심합니다. 1988년, 유니세프의 국제 친선대사로 임명된 오드리 헵번은 어린이를 돕기 위해 전 세계를 여행했습니다.
전쟁이나 자연재해로 인해 어린이들이 고통받는 곳엔 오드리 헵번이 있었습니다. 유니세프 구호팀과 함께 수단, 케냐, 온두라스, 소말리아 등 12개 국가를 방문하여 영양실조 치료식, 식수, 백신, 치료제 등의 구호물품을 전달했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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오드리 헵번이 유니세프와 마지막으로 간 곳은 800만 명이 굶주리고 있는 소말리아.
여정 내내 그녀는 온몸이 부서질 듯 아팠습니다.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막을 가로지르는 여정을 계속하며 목마름과 배고픔으로 죽어가는 어린이에게 아름다운 손길을 내밀었습니다.
소말리아 방문 후, 병원을 찾은 오드리 헵번은 대장암 판정을 받았습니다. 큰 수술을 받았지만, 암세포가 몸 전체로 퍼진 상태여서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. 1993년 1월 20일, 오드리 헵번은 두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름다웠던 생을 마감합니다.
유니세프 친선대사 오드리 헵번이 자녀에게 마지막으로 읽어줬던 시.
오드리 헵번의 아름다운 마음을 추억하며 그 일부를 옮겨봅니다.




오드리 헵번이 살아생전 남긴 말을 기억해 봅니다. “저는 유니세프가 전 세계 어린이를 위해 하는 일을 깊이 신뢰하며 감사하고 있어요. 유니세프는 전 세계 어린이에게 큰 희망이라는 건 제가 보장할 수 있어요. 세계 2차대전이 끝난 직후 유니세프의 도움을 받아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.”
오드리 헵번은 이제 여기 없지만, 세상과 작별하기 직전까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그녀의 아름다운 마음은 유니세프가 여전히 이어가고 있습니다. 유니세프는 '차별 없는 구호'의 정신으로 인종·국적·성별과 관계없이 단 한 명의 어린이도 뒤처지지 않는 세상, 모든 어린이가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오늘도 190여 개 나라 및 영토에서 일하며 가장 취약한 어린이에게 먼저 달려가고 있습니다.